의미 있는 부산의 장소(한국전쟁, 감천문화마을, 보수동)
아름다운 바다와 산 그리고 화려한, 더 나아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부산, 부산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고 소중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타지에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고향이기도 합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부산의 의미는 다양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해에 많은 사람들이 부산을 찾습니다. 그리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마음속에 부산을 담아갑니다. 부산은 여러분의 기억 속에 어떤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까? 아직 부산을 방문하지 못하신 분들은 부산에 방문을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까? 부산의 어느 곳을 찾고 싶으신가요? 경치가 아름다운 곳, 쇼핑하기 편리한 곳, 재미있는 곳, 아마 여러 장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주 의미 있는 곳은 어떠십니까? 부산에는 의미 있는 기억을 지니고 있는 곳이 참으로 많습니다. 부산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와 기억을 간직한 장소들, 그 속에 깃들어있는 기억을 되짚어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부산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의미를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부산의 장소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부산의 한국전쟁 역사 장소
오늘은 그중에서 한국전쟁의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장소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부산의 근대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하였기에 6·25 전쟁이라고도 하고, 6·25 사변이라고도 합니다. 사변이란, 전쟁 선전포고 없이 국가 간에 이루어지는 무력충돌을 뜻합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한국전쟁이 얼마나 갑자기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6·25 동란이라고도 합니다. 동란이란, 사전적인 의미로서 폭동, 반란, 전쟁 따위가 일어나 세상이 매우 어지럽혀진다는 뜻입니다. 전쟁, 사변, 동란, 그 시절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말들입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는 6·25 전쟁은 국제적으로는 한국전쟁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3년 동안 약 450만 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으며,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거시설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분단의 결과를 가져왔으며, 휴전은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1129일 중에서 1023일 동안 부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습니다. 부산시 서구 부민동에 임시수도 기념관이 현재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남도지사의 관사로 사용되었다가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 사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부산시가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보수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유품 등 다양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전쟁 당시 부산으로 사람들만 피난을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부의 각 기관들도 부산으로 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임시수도 청사는 전쟁이 끝나고 경상남도 청사로 사용하다가 지금은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 동족상잔의 비극이자 아픈 상처로 남아있는 한국전쟁,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한국전쟁은 조금씩 잊혀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산의 많은 장소들이 아직도 그 기억들을 간직한 채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한번 가보시겠습니다. 세계는 아직도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있습니다. 매년 11월 11일 11시 정각이 되면 부산 전역에 추모 사이렌이 울리게 됩니다. 그러면 한국전쟁에 참전한 22개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UN 기념공원이 있는 부산을 향해서 동시에 1분간 추모 묵념을 합니다. 바로 2007년부터 시행 중인 'Turn toward Busan', 우리나라 말로는 '부산을 향하여'라는 뜻을 지닌 국제 추모행사입니다. 행사의 슬로건은 '부산을 향해 하나 되는 순간'으로 이는 곧 국경을 초월해 하나 된 마음으로 UN 참전용사들을 추모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였던 캐나다인 빈스 커트니 씨의 제안으로 한국 시간에 맞추어 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UN 기념공원,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전사하신 UN군의 유해를 안장한 곳입니다. 이전에는 16개국에 1만 천 명의 전사자가 안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많은 유해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2,300여 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한 16개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프랑스, 뉴질랜드, 필리핀, 터키, 태국, 남아메리카, 그리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에티오피아, 콜롬비아입니다. 그리고 의료지원을 해준 나라는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항상 참전 나라와 참전용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은 1955년 11월, 대한민국 UN군의 희생을 보답하기 위해서 토지를 UN에 영구 기증을 하였고, UN에서 영구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영도대교와 한국전쟁
매일 오후 2시, 부산의 번화가 중 한 곳인 남포동에 590톤에 달하는 거대한 교각 하나가 도개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바로 1934년 개통되어 남포동과 영도를 연결하는 영도대교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유일의 도개교이며, 당시 동양 최초의 도개교였습니다. 이렇게 장관을 연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는 영도다리와 한국전쟁은 어떠한 연관이 있을까요?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서는 영도대교가 전국적으로 나름 유명했기 때문에 피난민들은 가족을 찾는 만남의 장소로 생각을 했습니다. '살아있다면 부산 영도다리에서 다시 만나자'라는 말과 함께 전쟁으로 헤어진 부모, 형제를 만나기 위해 이 영도다리 아래에는 피난민들이 항상 북적였습니다. 그리고 피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점집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곳은 점쟁이 골목이라고 불렸는데, 피난민들은 헤어진 가족들의 생사를 알기 위해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점집을 찾았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영도대교에 이렇게 애잔한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감천문화마을
한 해 약 30만 명이 방문한다는 한국의 마추픽추로 불리는 감천문화마을이 있습니다. 계단식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어 마추픽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천문화마을은 처음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정착해서 만든 대표적인 마을입니다. 한때는 낙후된 달동네, 산동네라고 불렸는데, 2009년부터 도시재생사업으로 시작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하여 벽화로 유명한 마을이 되었으며, 그 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천문화마을과 인접하고 있는 아미동 비석문화마을도 있습니다. 피난민들이 모여들다 보니 거주지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판잣집들이 언덕이나 산자락을 따라 빽빽하게 지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공간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무덤 위에도 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아미동 산 밑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의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해방 후 일부 유골은 가지고 갔지만, 대부분의 일본인 유족들은 이장을 할 겨를도 없이 떠나는 바람에 무덤은 방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집을 지을 재료도 부족하다 보니 공동묘지에 비석을 집 짓는 재료로 사용하여 지은 집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비석마을이라고 불립니다. 당시 피난민들은 힘든 삶 속에서 귀신보다 배고픔이 더 무서웠다고 합니다. 그래도 망자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 이곳 주민들은 지금도 비석 앞에서 수시로 물 한 그릇, 밥 한 그릇을 놓고 영혼을 위로해주며, 명절에도 제사를 같이 지내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음력 7월 15일에는 인근 절에서 단체로 일본인 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삶 속에서도 우리 민족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보수동
오늘날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이름을 떨치게 된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바로 교육입니다. 노천에 천막을 치고 학교를 열어 교육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당시 지금의 보수동 일대에는 이런 노천 학교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서 보수동 골목길은 수많은 학생들로 붐비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헌책이라도 감사하며 공부를 해야 했던 시절, 노점 헌책방이 하나둘 보수동 골목에 자리 잡게 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헌책을 구하기 위해서 보수동을 찾기도 했지만, 형편이 어려워지면 가지고 있던 책을 팔기도 하고 때로는 책을 저당잡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의 보수동 책방 골목은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있습니다. 헌책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서로 저렴하게 구할 수도 있고, 아직까지도 사랑을 받는 부산의 명소입니다. 한국의 혼란한 시대를 거치며 아픔과 함께 이곳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간직하고 있는 부산. 부산을 떠올리면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헤어진 슬픔이, 누군가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터전의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기억될지 모릅니다. 부산의 현재 모습을 가지기까지 격동의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오늘날의 부산을 만들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산 지형, 특징, 부산 역사, 관광'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의 관광과 유흥, 동래온천과 전차, 서면경마장 (0) | 2022.07.27 |
---|---|
부산의 소득과 소비 (0) | 2022.07.27 |
부산의 지명과 볼거리(바닷길, 산길) (0) | 2022.07.27 |
부산사람의 기질과 특성 (0) | 2022.07.26 |
부산 명칭의 역사 (0) | 2022.07.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