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형, 특징, 부산 역사, 관광

부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와 특징

토마토앱 2022. 8. 5. 11:38

부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와 특징

부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와 특징
부산지역 항일독립운동의 전개와 특징

부산은 개항 이전 동래부에 속한 부산포에서 발전했습니다. 1876년 개항과 함께 초량에 왜관이 설치돼 운영되면서 부산은 급격한 변화를 겪기 시작합니다. 앞선 강의에서 언급하였듯이 과거 부산은 동래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 문화가 발전해 왔지만, 일제강점기를 겪으며 전관거류지가 위치한 부산포, 즉 현재의 중앙동, 남포동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변화의 이면에는 제국주의 일본의 대륙침략 정책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산은 조선 최초의 근대 개항장이기도 했으며 일제강점기 식민지 침략의 발판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부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통제와 탄압은 타 지역보다 그 강도가 강했으며 가혹했습니다. 이러한 탄압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부산지역에서는 강력한 민족해방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을 통해 표출된 조선의 항일정신은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더욱 강해졌습니다. 이는 부산지역의 3. 1 운동으로 계승, 표출되었으며 1920년대의 청년운동과 노동쟁의, 1930년대의 항일학생운동과 조선 청년 독립당 운동을 통해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910년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강제 병합했습니다. 이 시기의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수탈 체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실시했습니다. 토지조사사업, 회사령, 사찰령, 광업령 등 식민지 조선의 토지, 경제, 산업, 종교 전반에 걸쳐 수탈을 위한 법령을 제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식민지 약탈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부산지역 반제국주의 운동 전개

이러한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는 반제국주의 운동 역시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부산지역에서는 주로 학생층과 부르주아 층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는데, 학생들이 중심이 된 비밀결사로는 부산산업학교의 대붕회와 구세단이 대표적이며 부르주아 층에 의해 만들어진 비밀결사는 대동청년단과 조선 국권회복단이 있었습니다. 특히 구세단은 훗날 의열단으로 활동하는 박재혁과 최천택, 오택 등이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조선 국권회복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중산층과 경남 지역 인사들이 일부 참여하였는데 부산지역에서는 안희재의 백산상회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다만 1910년대 부산지역의 부르주아 비밀결사운동에는 부산 인근의 지주, 무역상들이 참여했는데 부산의 토착 중산층인 초량 객주들은 나서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초량지역은 전관거류지가 설치되며 이미 상당수의 객주 상인들이 자본 축적 과정에서 친일화 되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성격 역시 형성되지 못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하는 부산지역의 항일운동 정신은 1919년 3.1 운동에 표출되었습니다. 특히 부르주아 층을 비롯해 학생층, 종교계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주도하였는데, 동 레고보 학생의 만세시위와 범어사 명정학교와 지방 학림 학생들이 주도한 만세시위는 그러한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들의 이러한 활동은 개항 이후 지속된 일본 자본 매입과 일본인 위주의 도시계획으로 타격을 받은 상인, 노동자, 농민들이 대거 3.1 운동과 이후 실시된 사회운동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사진은 범어사 명정학교 출신인 김법린입니다.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무단통지(치) 체제를 이른바 문화통치로 변경하여 정책적인 변화를 계획했습니다. 일본의 이러한 정책 변화는 기존 무단통치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일종의 가면 정책이었지만 이전보다는 누그러진 사회 분위기 속에서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등 각계각층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이 조직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단체의 사회운동

1920년대 부산지역의 사회운동의 중심은 청년 단체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문화통치 정책 속에서 다양한 문화운동 단체가 성장하게 됩니다. 특히 부산지역의 자본가 계급은 실력양성론이라는 새로운 사상을 통해 이른바 문화운동을 펼쳤으며 이를 실행하는 단체가 각 지역의 청년회였습니다. 이 시기 탄생한 부산의 대표적인 문화운동단체는 기미 육영회와 부산 예 월회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체는 모두 부산과 인근 지역의 토착 자본가들이 참여해 결성한 단체로서 지역 청년들 중 두각을 나타내는 청년들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통해 지역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습니다. 1920년 두 단체는 부산청년회라는 이름으로 통합, 확장되어 부산지역 사회운동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부산청년회는 회보를 발행하고 야학을 개최하였으며 노동단체들과 연계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부산진 앞바다에 조선인 해수욕장을 개장하고 부산진 매축지에서 시민 대운동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에 1930년대 조선총독부는 통치체계를 확립을 위해 행정구역을 재편, 확대하고 통제기구를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토지수용령과 계획령을 통해 구체화되면서 식민지 조선은 대륙 병참기지의 역할이 강제되었습니다. 부산 역시 이러한 국책사업을 통해 군수공업도시로 변모하였는데 부산진과 영도에 공단이 조성되며 일본 자본가들이 조선의 공업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며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부산 지역이 일본인 인구도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876년 82명에 불과하던 조선의 일본인 숫자는 1940년대에 들어서면 약 20~30만 명 정도로 크게 늘어납니다. 이들 일본인들은 대부분 상업에 종사하였고 조선인들은 고기잡이, 하역, 운반 지게꾼 등의 직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또한 소수의 일본인 부호가 부산의 부동산을 독점하여 일부 조선인들은 제방이나 다리 밑의 토막이나 토굴에 거주하였는데 이는 당시 시행된 일본인 중심의 도시행정정책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이 그림은 신창동에 있는 일본인 거주지 풍경이고 또 한 그림은 1930년대 대청동 풍경입니다. 당시 부산지역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정책에 기반 한 참혹한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1920년대 들어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며 도시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후 이러한 단체들은 단순한 노동운동에 그치지 않고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정치, 사회운동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1937년의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 수탈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특히 인적자원의 수탈이 극심했는데 1938년의 국가총동원법을 시작으로 1943년의 학도병제를 거쳐 1944년의 징병제를 통해 조선학생들을 군사적으로 동원하는데 힘을 쏟게 됩니다.

부산 항일학생의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부산 항일학생의거가 일어납니다. 부산 항일학생의거는 1940년 11월 23일 조선총독부가 학생들에 대한 군사 집체훈련을 강화하자 부산지역 학생들이 이에 집단 반발하여 시위를 벌이고 투쟁을 벌였던 사건을 말합니다. 흔히 부산 항일학생의거를 일명 어다이사건이라고 도 부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부산은 교통의 요지이자 물자 보급의 거점으로 그 중요성에 비례하는 변화를 강요받습니다. 이러한 지역적 요인과 임진왜란 이후 형성된 항일정신이 결합하여 부산지역의 항일독립운동은 시대 상황에 따라 방법, 성향, 형태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또한 부산은 미군정과 한국전쟁, 개발독재 시기를 거치며 그 중요성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으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형성된 부산만의 치열성과 다양성은 일제강점기의 파쇼체제, 독재정권의 반민주화 정책 등에 맞서 자연스럽게 분출되어 부산을 민주화의 성지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