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출신 의열단원 박재혁
의열단의 이름은 의열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쳐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알리고 민족의 대의를 밝히는 일을 맡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의열이라는 단어에는 의사와 열사의 맹렬한 자기희생 정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909년 안중근의 의거는 이러한 의열투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의열투쟁이 본격화된 것은 3. 1 운동 이후입니다. 폭력적인 무단통치체제에 항거했던 3. 1 운동은 독립에 대한 민족적 투쟁의 응집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19년 11월 9일 김대지, 황상규, 김원봉, 이종암 등이 중심이 되어 암살과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의열단이 만들어졌습니다. 의열단은 신재호가 작성한 조선혁명 선언을 통해 의열투쟁의 이념과 방략을 명확히 제시하였습니다. 즉 의열단은 의열투쟁의 목표로 절대 독립론을 내세웠고 그 방법으로 무장투쟁, 전술로 암살, 파괴, 폭동 등을 제시하여 민중에 의한 직접 혁명론을 천명하였습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글은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 선언 중의 일부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결국 독립투쟁이라는 것은 결국 폭력, 암살, 파괴, 폭동을 통해서 독립을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민주 혁명론을 주장하는 것이죠. 특히 의열단은 이른바 8 가살 6 파괴 대상을 내세움으로써 무차별적인 테러행위와 차이를 두었습니다. 8 가살은 일왕,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부,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밀정, 친일 양반 지주이며, 6 파괴의 대상으로는 일왕의 왕궁, 조선총독부, 동양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의 중요기관들을 설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바탕으로 초기 의열단은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거, 상해 황포탄 의거,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동양척식 주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거 등을 주도하며 1920년대 무장독립투쟁을 이끌어 왔습니다. 1924년경에는 약 70명의 단원에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재호 등이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중화민국 총통이었던 장개석의 지원을 받으며 국내외에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부산 출신 의열단원 박재혁
부산 출신의 의열단원 박재혁은 1895년 부산 범일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5세 무렵 부친이 사망하자 모친의 삯바느질로 힘들게 연명하며 사립 육영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이후 박재혁은 부산 공립 상업학교로 진학하게 됩니다. 부산 공립 상업학교에 입학한 박재혁은 최천택, 오택 등과 만나 각별한 관계가 됩니다. 이들은 좌천동 증대산에 올라 결의형제를 맺고 모든 일에 뜻을 같이 하자고 굳게 맹세를 합니다. 최천택과 오택은 훗날 부산청년회와 신간회 부산지회에서 활동한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박재혁이 1917년 중국으로 가기 전까지 함께 다양한 항일운동을 함께 하게 됩니다. 제일 위에 그림은 박재혁이 다녔던 부산 공립 상업학교의 전경입니다. 지금은 학교가 옮겼고 지금은 개성고등학교로 이름 붙입니다. 박재혁을 비롯한 최천택, 오택의 항일의식은 1912년 이른바 동국 역사 배포 사건을 계기로 처음 표출됩니다. 1899년 발간된 동국 역사는 사학자 현채가 초등학교용 교과서로 만든 역사책입니다. 강제병합 이후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시기 발행한 역사교과서는 발행이 금지되고 압수, 소각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이러한 행태에 불만을 가진 박재혁과 일행은 등사기를 이용해 동국 역사를 복사하여 학우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결국 발각되어 최천택이 일시 검거되고 박재혁을 비롯한 이들은 중요 감시 인물로 낙인찍혀 감시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책이 바로 박재혁, 최천택, 오택 등이 등사하여 배포한 동국 역사책입니다. 동국 역사 배포 사건 1년 뒤 박재혁은 김경태, 박종민, 왕치덕, 조영상, 오택, 김영주, 장지형 등 부산 공립 상업학교와 부산진 일대의 친구들을 규합하여 구세단을 조직합니다. 구세단의 목표는 조국광복에 이바지하기 위해 항일투사의 국내 연락처 역할을 자처하고 유사시 비밀결사대로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활동 6개월 만에 경찰에 적발되어 주동자 모두 체포되고 박재혁, 오택, 김인태 등은 구속되어 일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구세단 해체를 조건으로 일시 석방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재혁은 항일독립운동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비밀결사운동 전개
박재혁은 최천택, 김인태와 함께 밀양지역의 비밀결사대였던 일합사와 교류하여 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부산의 구세 단과 밀양의 일합사는 상호 구성원들의 인적 교류를 통해 연결돼 있었으며 나아가 만주지역의 무장독립운동단체와도 그 노선을 함께 하였습니다. 1916년 박재혁은 부산 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전기가스회사에 취직하였으나 곧 그만두고 친척이 운영하는 경북 왜관의 곡물상에서 일하게 됩니다. 박재혁은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 700원을 마련해 1917년 상해로 출국하게 됩니다. 이후 박재혁은 부산으로 일시 귀국한 뒤 다시 상해를 거쳐 싱가포르로 이동해 일을 하다가 1920년 다시 상해로 돌아옵니다. 이때 박재혁은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 활동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고 본격적인 무장독립투쟁활동을 전개하게 됩니다. 상해에서 김원봉을 만나 폭탄 의거를 계획한 박재혁은 상해에서 시모노세키로 건너가 그곳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입항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관부연락선은 부산과 일본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항로로서 일본형사들이 입국하는 조선인들을 수시로 감시, 검문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박재혁은 감시가 다소 허술했던 대마도 이즈하라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배편을 이용해 감시를 피해 무사히 부산에 도착하게 됩니다. 박재혁이 대마도에서 의열단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와 암호문입니다. 한번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어제 나가사키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래가 뜻대로 잘 되고 있으니 이것이 모두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인가 합니다. 초가을 바닷바람에 심신이 쾌락합니다. 많은 이득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당신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전과 비교해 더 좋은 상로가 있으니 연구하면 알 것입니다. 비장한 결심을 한 걸로 보입니다. 박재혁이 배를 타고 내렸을 부산항 장경의 모습과 저 멀리 일장기가 걸린 부산 부청의 모습이 보입니다. 본래는 부산 이 사청이었지만 강제병합 이후 부산 부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산 부청 건물 뒷산이 용두산입니다. 부청 건물 아래가 부산경찰서가 위치해 있었습니다. 박재혁의 처음 목표는 부산을 오가는 고관대작이나 서울의 조선충 독부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부산에 들어온 박재혁이 의거 대상과 장소를 물색하며 위치를 보낸 것을 확인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친구인 오택에게 일본인 형사가 접근해 박재혁의 입국 경위와 이유에 대해 탐문하고 돌아가자 불안감을 느낀 박재혁은 결국 기존의 계획을 수정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게 됩니다. 이후 박재혁은 오택과 용두산 공원으로 이동해 목표인 부산경찰서를 정찰한 뒤 함께 마지막 기념사진을 촬영합니다. 당시 부산경찰서장인 하지모토가 고서 수집에 취미가 있음을 알고 있던 박재혁은 중국인 고서 수집상으로 위장해서 하지모토를 만나게 됩니다. 하지모토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자리한 박재혁은 고서를 꺼내는 척하며 폭탄을 꺼내 투척합니다. 부산 부청과 부산경찰서 정면의 큰 봉우리 부산 부청이고 오른쪽 아래가 부산경찰서입니다. 옆에 있는 그림은 용두산 공원에서 정찰 후 박재혁과 오택이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폭탄이 터지며 하지모토는 큰 부상을 입게 되고 박재혁 역시 무릎에 파편이 스치며 부상을 입고 현장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이후 최천택과 오택, 김영주 등도 공범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들 모두 공범 사실을 부인하고 박재혁 역시 단독 범행임을 주장하고 이들은 기소 유예 처분되어 석방되었습니다. 검거된 박재혁은 살인미수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상소했지만 결국 오히려 사형이 언도됩니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박재혁을 출소한 최천택이 자주 찾았으나 박재혁은 최천택에게 '이미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말과 함께 일본인들 손에 사형당하기 싫어 단식 투쟁 중이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박재혁은 단식을 이어가다 결국 사형집행 예정일 전인 1921년 5월 11일 옥중에서 순국하고 맙니다. 부산일보 호외에서 나왔습니다. 1920년 9월 4 일자고 또 다른 그림은 박재혁 의사 판결문입니다.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박재혁의 시신은 경부선 철도를 통해 5월 14일 고향인 부산진역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일본은 죽은 박재혁 조차 가만히 두질 않았습니다. 일제는 조선인들이 장례식을 계기로 소요사태를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서 가족 중 남자 2명, 여자 3명만 장례식에 참석하도록 제한하였으며 장례식이 끝난 뒤에는 인부 2명만 동원하여 부산진 공동묘지에 묻도록 하였습니다. 1962년 대한민국의 정부에서는 이러한 의사를 공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박재혁 의사의 의거와 순국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부산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배의 전초기지였으며 경찰서는 국가 공권력의 출발점입니다. 더구나 부산경찰서는 부산 부청과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박재혁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는 일본의 행정력과 공권력이 집중된 공간에서 조선인의 저항의 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박재혁 의사의 의거 이후 부산경찰서 형사들은 폭발 현장의 행인들을 닥치는 대로 검거했으며 최천택과 오택도 이 과정에서 체포되고 맙니다. 한편 일본의 언론들도 박재혁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을 보도하여 조선과 일본의 융화는 근본적으로 실패했다는 비판기사를 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부산이라는 공간이 일본인들에게 전해주는 의미는 남달랐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설정되고 변하고 있던 도시 부산에서 발생한 박재혁 의사의 폭탄 투척 의거는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형태에 일침을 가한 의열 그 자체였습니다. 1948년 10월 1일 최천택과 오택 등이 박재혁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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