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지형, 특징, 부산 역사, 관광

독입 운동가 박차정과 대한민국 1호 여성 경찰서장 양한나

토마토앱 2022. 7. 28. 23:04

독입 운동가 박차정과 대한민국 1호 여성 경찰서장 양한나

독입 운동가 박차정과 대한민국 1호 여성 경찰서장 양한나
독입 운동가 박차정과 대한민국 1호 여성 경찰서장 양한나

박차정은 1910년 경남 동래 북천동 417번지에서 부친 박용한과 모친 김맹연의 3남 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습니다. 박용한은 대한제국 시기 측량기사로 도지부 주사 자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박용한은 일본의 강제병합과 무단통치 행태에 분노하다 결국 1918년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부친이 사망하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어졌지만 어머니 김맹연은 5남매를 훌륭히 키웠습니다. 특히 김맹연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두봉과는 사촌지간이며 역시 독립운동가이자 제헌의원 국회부의장을 지낸 김두전과는 6촌 사이였습니다. 또한 부산경남지역의 사회주의 청년운동을 이끌었던 박일형과는 고종사촌 사이였습니다.

박차정의 독립운동

강제병합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아버지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즐비한 가풍으로 짐작해 볼 때 박차정의 강한 민족의식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입니다. 큰오빠인 박문희는 동래사립고등학교 재학 시절 항일학생운동을 주도했으며 1930년대에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둘째 오빠 박문호 역시 동래사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신간회 활동과 의열단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나 결국 체포되어 1933년 중국에서 옥사하였습니다. 1925년 박차정은 기독교계 열인 동래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해 1929년 졸업하였습니다. 동래 일신여학교는 1895년 좌천동에 설립된 부산진 일신여학교가 시초입니다. 이후 복천동으로 이전해 동래 일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부산지역 여성교육, 여성 항일운동의 산실로 3.1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던 곳입니다. 1920년대 중반 동래는 각종 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기에 박차정 역시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일신여학교 동래 유학을 주도하고 교지에 민족의 고난을 상징화한 철야 소설을 수록하여 항일학생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습니다. 박차정은 1920년대 후반 근우회 동래지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근우회 동래지회는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이 모여 기존 단체를 해산하고 조선 여성 단일 동맹인 근우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하면서 탄생한 단체입니다. 박차정은 동래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후인 1929년 중순경부터 근우회에 가입하여 중앙상무위원과 교칙 세칙 제정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박차정은 광주 항일학생운동과 서울 여학생 시위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였는데 이로 인해 2번에 걸쳐 체포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근우회 동래지역 활동 중 2차례에 걸쳐 구금되고 고문을 받으며 건강이 나빠진 박차정은 집에서 은거하다 당시 중국에서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던 둘째 오빠 박문호의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이동합니다. 1930년 봄 박차정은 중국에 도착해서 김원봉이 주도하고 있던 레닌주의 정치학교 운영에 참여하여 교육활동에 관여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박차정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국내와의 연결이 끊기고 자금난이 심해지자 김원봉과 박차정은 남경으로 거처를 옮겨 항일투쟁을 이어가게 됩니다. 김원봉은 남경에서 국민당 정부의 재정지원 하에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총 3기에 걸쳐 12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됩니다. 박차정 역시 이곳에서 임철 애, 임철산 등의 가명을 사용하여 교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박차정은 중국 관내의 민족해방운동 형제들의 연합인 민족혁명당 내의 남경 조선 부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이후 민족혁명당이 조선민족통일전선 연맹으로 통합 정비되면서 박차정 역시 이곳에서 각종 선전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남경 조선 부녀회 창립선언문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다.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조선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통치의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인해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자 조선민족통일전선 연맹은 중국군사위원회와 협의하여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습니다. 박차정은 이곳에서 한인 부녀자 교육하고 의용대 대원 확보, 교육하는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후 조선의용대 부녀 복무단이 만들어지자 박차정은 복무 단장으로 활동하여 선전, 선무활동을 담당하게 됩니다. 1939년 박차정은 염홍덕이 이끄는 남녀 공약 대원들과 북상하며 실은 곤륜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그 후유증으로 투병생활을 지속하다 결국 1944년 5월 27일 3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사실 박차정 여사가 순국하고 난 다음에 공원묘지에 결국 묻혔는데 그 공원묘지는 이웃나라에 이름 없는 독립 운동가들이 다 묻혀있는 인제 공동묘지입니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하얀 꽃이 피게 되는데 그래서 중국 사람은 지금도 그 꽃을 조선화라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1호 여성 경찰서장 양한나

양한나는 1893년 동래 복천동에서 부친 양덕유와 모친 한영신 사이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양한나는 서울로 진학하였지만 집안문제로 인해 다시 부산으로 돌아와 일신여학교 고등과를 제1회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일신여학교는 호주 기독교 장로회 선교부의 선교활동으로 만들어진 교육기관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약 10개의 기독교 계열의 여성교육기관이 있었는데 이러한 교육기관들은 남녀평등사상과 신문화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양한나가 졸업한 부산진 일신여학교의 모습입니다. 양한나 역시 일신여학교의 이러한 교육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지역의 후배들과 여자 기독교 청년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였습니다. 시대적으로 볼 때 딸을 서울과 일본에 유학을 보낸 사실은 부친인 양덕유의 개방적인 성격과 자유스러운 가정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박차정과 마찬가지로 양한나의 집안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분위기에서 일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양한나는 마산에 위치한 의신 학교의 교원으로 근무를 합니다. 의신 학교 역시 기독교 계열의 학교로서 민족의식 함양에 치중했던 학교였습니다. 양한나는 1915년 일왕 즉위 기념으로 나온 떡을 먹지 말자는 운동을 학생들과 벌이다 요주의 인물로 분류됩니다. 결국 양한나는 1917년 일본 요코하마에 위치한 요코하마 신학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양한나의 민족의식은 여전히 영친왕 이은과 일본의 이방자의 정략결혼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려다 사전에 발각되기도 했습니다.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양한나는 상해로 밀항하여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양한나는 도산 안창호를 만나 본래 이름인 개념을 버리고 한나라는 이름을 받게 됩니다. 한나라는 이름은 백두산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전하라는 뜻으로 도산이 만들어준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앞서 언급한 이런 이야기들 중 일부는 조금씩 연도상의 오류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양한나의 행적이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고 오로지 구슬로 전해졌기 때문이라 추측됩니다. 상해에서 귀국한 양한나는 부산여자 청년회를 설립하여 1920년대 부산지역 여성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부산여성 청년회는 국민 계몽을 강조하는 20년대 초반의 민족주의 계열의 여성단체로서 문맹 타파를 위한 야학운동을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여 가정위생, 여성해방, 자유 평등주의와 봉건적 인습에 대한 탈피를 목표로 부산지역 여성들의 의식을 일깨우는데 앞장섰습니다. 이후 중국과 부산을 오가며 국외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일신여학교 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과 기독교 사상에 기반 한 민족계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양한나는 1926년 호주로 유학을 결정하는데 당시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의 호주 유학이라 세간의 큰 관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양한나는 통영과 부산에 각 진명 유치원과 3. 1 유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며 유아교육에 집중했습니다. 이 시기 양한나는 뚜렷한 활동 내역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는 1930년대 사회운동의 큰 흐름이 사회주의 계열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기독교 계열의 계몽운동에 집중하고자 한 양한나는 유치원 운영에 집중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과는 일정 거리를 두었던 양한나는 광복 이후 한국 애국부인회 활동을 시작으로 우익계열 여성 사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양한나는 이 단체에서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는데 한국 애국부인회는 부인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고 위생 정치 강좌를 실시하는 등 부인 계몽운동을 실시한 단체였습니다. 공창제 폐지는 일제강점기부터 여성해방운동의 일환으로 꾸준히 제기되었으며 박차정이 가입하여 활동하던 근우회 역시 공창제 폐지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공창제 폐지운동은 일제강점기 내내 좌우익을 막론하고 꾸준히 제기된 사안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양한나는 공창 폐지를 위해 경찰서장 직권으로 해당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머리를 삭발시켜버리는 등의 과격한 단속을 시행하였습니다. 결국 미군정은 양한나의 이러한 행위를 인권침해라고 판단한 뒤 양한나를 직위에서 해제시키고 말았습니다. 양한나의 이러한 행위는 다소 과격하기는 했지만 평생을 여성인권 신장과 보호를 위해 헌신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가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양한나는 부산여자 기독교청년회에서 1년 남짓 활동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전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양한나의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매여숙 운영입니다. 양한나는 자매여숙을 통해 한국전쟁 이후 길거리에 방치된 고아와 여성들을 보호하고 치료하였습니다. 특히 양한나는 기존의 감금과 구속이 중심이 된 여성 정신질환자 치료에 거부감을 느끼고 가마니 짜기, 새끼줄 꼬기, 골무 만들기 등의 꾸준한 노동과 인간적인 대우를 통해 병을 치료시키려 노력하였고 실제로 20년 동안 200명에 가까운 여성들을 완치시켰다고 합니다. 말년의 양한나 여사의 모습입니다. 기장읍 만화리 부산진교회 묘역에 있는 양한나 여사의 묘비입니다. 앞에서 살펴 본거와 같이 박차정과 양한나는 비슷한 시기 부산 그리고 동래라는 지역적 특징과 함께 기독교 계열, 일신여학교 출신이라는 사상적, 교육적 특징을 공유하는 여성이었습니다. 다만 두 여성의 삶의 궤적은 조금 달랐습니다. 박차정은 오빠들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계열에 반제국주의 사회운동, 여성해방운동에 이어 더러 본인이 직접 무장독립투쟁에 참여하는 적극성을 보여주며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였습니다. 양한나의 경우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사상과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서울, 일본, 호주에서 유학을 통한 경험에서 민족주의에 입각한 여성 계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이후 양한나는 기독교 계열의 사회운동에 전념하여 소외되고 보호받지 못한 여성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며 봉사하는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이처럼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수탈이라는 무차별적인 침략과 야만성에 대항해 박차정과 양한나는 변방이라는 지역적 한계와 전통 사회의 여성상을 극복하고 다양한 사회경험과 신식 교육을 통해 형성된 자신의 신념을 각기 다른 영역에서 과감히 실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은 여성의 해방과 인권신장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던 여성 독립운동가와 여성 사회 운동가의 진정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