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관거류지 조성과 용두산 신사
전관거류지는 초량왜관을 대신해 설치된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격은 과거 왜관의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제국주의 일본은 전관거류지를 통해 이웃한 나라 조선의 속살을 보았고 그 틈을 조금씩 벌려가며 결국은 식민지 지배라는 날카로운 칼을 찔러 넣었습니다. 자, 100년 전 새롭게 만들어진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살펴보러 함께 걸어가 보겠습니다. 1876년 일본과 체결한 병자 수호 조규에서 부산을 비롯한 3개의 개항장을 설치하고 그곳에 일본의 전관거류지를 설치하도록 규정했습니다. 과거 부산에 존재했던 왜관은 외교, 통상을 위한 임시숙소였습니다. 하지만 1877년 동래부사와 일본 관리 사이에 약정한 부산항 일본 거류지 관리 조약을 통해 조선의 국가권력을 무시하면서 치외법권을 갖는 거류지가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조계(租界)라는 명칭을 사용하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부산 일본제국 전관거류지란 이름으로 과거 초량 왜관 자리에 설치되었습니다. 일본이 기존의 조계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거류지의 명칭을 사용한 것은 조계라는 공간이 갖는 상업성을 거부하고 거류지를 통해 민간인의 거주, 나아가서는 침략의 의도를 다분히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도를 바탕으로 일본은 전관거류지 내의 땅과 행정권을 모두 거류지 행정관이 관리하도록 했고 그 결과, 일본 전관거류지는 점차 일본 본토와 같은 형태로 변모하게 됩니다.
초기의 전관거류지
초기의 전관거류지는 초량왜관의 공간 구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용두산을 중심으로 동관과 서관으로 구분하였는데 동관에는 왜관의 관리자인 관수와 그가 거주하는 관수왜가가 있는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서관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생활구역이었습니다. 두 구역은 왜관을 관통하는 용두산으로 나뉘어 있었고 이를 장수 통으로 불리는 도로가 연결됐는데 현재는 광복로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1879년 관수왜가가 자리에 영사관이 건립되고 동관 주변은 경찰서, 은행, 상점들이 들어서며 거류지의 중심지로 바뀌었고 서관은 소규모 상점과 상인들이 거주하는 마을로 변모했습니다. 장수 통 중앙에는 앵천이라고 하는 하천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위생상의 이유로 복개가 되어 전차가 다니는 넓은 길이 되고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일제강점기 부산은 최고 번화가로 변화하였습니다. 초기 전관거류지의 영역은 초량왜관과 크게 다르지 않은 약 11만 평의 정방형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인구가 증가하자 행정구역이 점차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부산 일본 전관거류지의 최초 행정구역은 중심이 되는 본정과 상반정, 변천정, 입 강정, 행정, 서정 등이었습니다. 이후 행정구역이 확장되어 1880년 북 빈정이 설치를 시작으로 1908년까지 금평 정, 서산 하정, 남빈 정, 대청정 등이 설치되었습니다. 북 빈정은 현재의 중앙대 일대이고 남빈 정은 현재의 자갈치 일대입니다. 1877년 최초로 설치된 전관거류지의 구역과 통감부 시기를 거치며 확장된 전관거류지 구역이 나와있습니다. 전관거류지의 영역 확장으로 생성된 도심지는 현재는 남포동 및 부평동, 중앙동 등 부산 원도심의 중심지로 남아있습니다. 빈틈없이 들어선 양옥 주택의 광경에서 과거 전관거류지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의 생활모습을 추측해볼 수가 있습니다. 전차가 다니고 갖가지 화려한 간판들의 모습에서 전관거류지 내의 경제활동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전관거류지의 영역이 확정되면서 행정관리 기관의 명칭도 바뀌었는데 이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 변화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관수왜가를 대신하여 영사관이 설치되었는데 이 시기는 독립국가 조선의 행정권이 인정되는 가운데 전관거류지의 행정권이 행사되었습니다. 하지만 1904년 제1차 한일협약과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사관을 대신해 이사관이 전관거류지를 관할하게 됩니다. 조선에 설치된 통감부는 하부조직으로 조선의 주요 도시에 이사청을 두고 수장으로 이사관을 임명함으로써 지방행정을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전관거류지에 이사청이 설치되고 이사관으로 하여금 전관거류지의 행정권을 갖게 한 것은 조선 침략의 시발점으로서 부산과 전관거류지의 중요성이 컸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포산항 견취도는 1881년 일본인 화가가 전관거류지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영도와 오륙도, 멀리 대마도까지 그려져 있는데 용두산 부분을 확대해 보면 과거 관수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영사관과 중산 정상의 신사의 모습이 보입니다. 일장기를 달고 있는 영사관 건물과 군함의 모습에서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양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용두산의 예전의 이름은 중산이었고 흔히 송현산 이라고도 불리어졌습니다. 용미 산은 소산이라고도 불리어졌습니다. 용두산 공원 아래 송림에 위치했던 일본 영사관의 모습이 보입니다. 앞서 보았던 포산항 견취도에 그려진 모습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전관거류지를 통해 조성된 일본인 거류민단은 말 그대로 조선에 머무는 일본인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과거 초량왜관 시절부터 자신들이 믿던 신도를 조선으로 가져왔고 신도의 신들이 머무는 집인 신사를 건설해 일본에서의 삶을 조선에 그대로 연속시키고 투영시켰습니다. 또한 그들의 땅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의 신들은 과거 조선을 공격하거나 침략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신들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신을 믿는 일본인들도 점차 그들의 신처럼 변해갔습니다. 신도는 불교, 유교, 도교 등이 합쳐진 뒤, 일본의 고유 신앙으로 자리 잡으면서 귀족 및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일본의 종교입니다. 이후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며 천왕제 국가이념과 신도의 가부장적, 봉건적 성격이 합쳐지면서 일본의 국가신도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초량왜관 초기 용두산 자락에는 재물과 관련한 변재 신사, 항해와 관련한 금 도비라 신사, 조비 나신사, 상업과 관련한 도하 신사 등 주로 금전이나 상업,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신사가 존재했는데 이는 왜관이라는 공간적 특이성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8세기 일본 국학이 성장하면서 삼한 정벌과 관련한 신공황후와 관련한 신들이 신사에 모셔졌고 심지어 19세기 들어서는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이었던 가토 기요마사를 신사에 모시기도 했습니다. 초량왜관 시절 신사에 모신 신들의 면면을 보면 당시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의식 및 조일관계의 변화 양상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초량왜관이 일시 폐쇄된 뒤 왜관에 있던 5개의 신사는 방치되다시피 하며 쇠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거류지가 조성되고 거류민단이 형성되며 이러한 신사를 보수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용두산 일대의 신사들을 개, 보수하여 거류지 신사로 명명하였다가 1899년 7월에 용두산 신사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특히 1896부터 1899년 사이 일본의 실질적인 첫 번째 일왕이라 할 수 있는 오진을 시작해 초량왜관 설치와 관계가 깊은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 일선 동조론을 주장했던 스사노오 노미 코토, 삼한 정벌설의 주인공 신공 왕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이 용두산 신사에 봉사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은 1894년 청일전쟁의 승리 이후 더욱 적극화되었던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욕이 부산에 있던 일본인들에게 영향을 끼쳐 용두산 신사에 봉사되는 제신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물과 외형을 보아 전체적인 정비가 이루어지기 전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용두산 신사 일대가 잘 정비된 것으로 보아 1890년대 이후로 추측됩니다. 이후 1916년 용두산에는 이러한 신사 외에도 공원이 조성되어 일본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어대 전 행사, 순국 충사자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초혼식, 각종 전승 축하회, 일한병합 기념식 등 국가주의적인 행사가 개최되는 공간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처럼 전관거류지와 용두산 신사 및 공원은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침략에 있어서 첨병 역할을 했으며 통감부와 총독부 시절에는 체제의 선전 및 국가주의 사상을 주입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용두산 공원 조성
용두산 공원의 풍경인데요. 아래의 아래 막길과 왼편으로, 왼편의 담장으로 보아 현재의 동주여자고등학교 뒤편으로 연결된 길로 추측됩니다. 용두산 공원에 있는 그 신사는 해방 이후에 지금 부산타워가 그 자리에 설치되어있습니다. 조선에 정착한 거류민단의 수가 늘어나며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식수의 문제였습니다. 과거에는 우물을 이용하거나 하천 물을 사용했지만 인구가 너무 늘어 여의치 않게 되자 결국 근대적인 상수도시설을 조성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도 남아있는 성지곡 수원지입니다. 수원지는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제공할 식수를 1차로 모아두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면 음수 사원이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물을 마실 때 근본을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조선의 땅을 빌리고 조선의 물을 마셨던 일본 거류민들은 그 물이 어디에서 처음 시작되었는지 몰랐던 것일까요? 흘러가는 저 물길을 따라 함께 걸어가 봅시다. 1871년까지만 하더라도 초량왜관에는 2개의 우물이 있어 식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전관거류지 조성 이후 늘어나는 일본인들에 의해 식수문제에 직면하고 말았습니다. 일본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근의 보수천 상류에 죽관, 즉 대나무로 만든 관을 이용한 도수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이후 1886년에는 죽관을 목통으로 교체하여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설들은 그 규모가 미비하였기에 1890년대 이전까지는 여전히 우물을 통해 식수를 공급받는 실정이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으로 이주하는 일본인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게 됩니다. 늘어나는 인구 때문에 물 부족 현상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일본거류민단에서는 성지곡 수원지와 복병산 배수지 신설을 추진하게 됩니다. 당시 부산진 전포촌 상류의 초읍 성지곡 계곡을 선택하여서 전관거류지뿐만 아니라 부산진, 초량 등에도 급수가 가능할 수 있도록 정수장을 설치하자는 보고서가 채택되어서 성지곡 수원지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 당시 전관거류지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상수도 시설의 확충까지 고려한 보고서는 당시 일본이 추후 부산을 식민지배의 전진기지로 구상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117만 원이나 소요된 공사비 중 35만 원은 한국 정부의 일본인 재정고 문의 건의를 통해 보조받는 사실은 이미 일본 정치세력이 한국 정부의 행정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성지곡수원지 댐의 모습입니다. 성지곡 수원지 댐은 부산에 최초로 만들어진 콘크리트식 중력 댐이었습니다. 어, 성지곡수원지 댐에 새겨진 음수 사원 글귀입니다. 물을 마시기 전에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과연 댐을 만들었던 당시의 일본인들은 물의 근원이 어디에 왔다고 생각했겠습니까? 성지곡 수원지에서 여과 과정을 거친 물은 송수관을 통해 복병산 배수지로 보내졌습니다. 복병산 배수지는 일본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부산진과 중구 일대에 물을 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로 현재는 공원화되어 그 원형이 남아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지곡 수원지 당시 공사를 위해 철로를 깔아 자재를 운반했던 이때 사용된 기관차와 아, 철로는 추후 만들어진 부산. 동래 간의 경 편철도에 사용되었다고 보입니다. 또한 예정보다 21만 원 정도의 공사비용이 줄었는데 이는 수원지 조성과정에서 수몰된 조선인들의 토지 보상비용이 정당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추측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복병산 배수지의 현재 모습입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습니다. 배수지 내부의 입구에는 요지 무진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 뜻은 신선의 땅에 흐르는 물처럼 영원히 마르지 않는다 는 뜻입니다. 전관거류지의 설치와 확장은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배의 과정의 시작이자 축소판과 같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들은 종교, 식수와 같이 삶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부산에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에게 부산은 일본에 두고 온 고향의 투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100년 전의 부산은 일본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일본 같았으며 조선의 그 어떤 도시보다 조선 같지 않았습니다. 생활영역의 확장, 행정기관의 설치, 식수의 확보, 일본은 그렇게 식민지배의 뿌리를 천천히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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