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 매축공사와 부산의 지형변화
부산항 매축공사와 부산의 지형변화
부산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진 근대적 매축공사는 1888년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주선으로 현재 부산 데파트 동쪽 지역의 용 미산 일대를 매립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하지만 개항과 함께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무역량이 증가하자 새로운 항만시설과 주거 구역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후 1902년 시작된 북빈 매축공사를 시작으로 영선산 착평 공사, 부산진 매축공사 등이 진행되며 부산의 해안선과 도시공간은 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원도심이라 불리는 지역이 그냥 도심이라고 불렸던 그때, 산을 깎고 바다를 메워 만들어진 부산의 모습은 어떠했는지 지금 함께 걸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과 1877년의 부산항 조계 조약을 통해 과거 초량왜관 자리에 있던 전관거류지가 조성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무역량도 많아지면서 주거지 확대와 항만시설의 확충 요구가 증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1898년 부산 매축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현재의 부산데파트와 부산우체국, 부산연안여객터미널, 중앙로와 세관 일대를 매립하는 북빈 매축공사를 대한제국 정부에 요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1902년부터 1908년 사이 1, 2기에 걸쳐 일대의 바다를 매립하여 4만 1374평의 부지를 확보하였고 이를 통해 현재의 중앙동 일대의 도시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북빈 매축은 전관거류지에 한정되어 있던 일본인들의 생활영역이 현재 원도심이라 부르는 동구 및 남구 일대와 부산 북부 지역까지 확장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차례에 걸친 매축 공사
북빈 매축과 영선산 창평 공사를 통해 현재의 초량, 부산진 일대로 생활영역을 넓힌 일본인들은 초량에서 범일동에 이르는 약 40만 평의 부지를 매립하기 위해 1912년, 조선기업 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공사는 모두 3차례로 나누어 실시될 계획이었는데 1기는 1912에서 1915년으로 약 13만 7천 평, 2기는 1918년 3월부터 약 17만 평, 3기는 1921년 3월까지 나머지 평수를 매립할 예정이었습니다. 다만 일정이 조금 변경되어 1기 공사가 1917년까지 진행되었고 이로 인해 2기 공사일정에 포함된 영가대 일대까지 1기 공사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때 조성된 부지 중 약 10만 평 규모의 공터는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조선으로 이동한 일본군이 머무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2기 공사는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실시되었는데 현재의 자성대 앞쪽 범일동 일대와 우암동 앞바다 30만 5천 평을 매립하여 부지를 조성하였습니다. 이곳에는 미곡 창, 철도관사, 경찰서, 우체국, 초량역, 부산진역, 학교 등의 생활시설이 들어섰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되었습니다. 또한 이러한 공사의 실시와 함께 부산항에 제1잔교와 제2잔교를 설치하는 공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잔교를 통해 부산항은 대륙 운송과 해상운송을 연결하는 중요시설로 변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지역뿐만 아니라 영도지역의 공업용지 확보를 위해 대풍포 매축공사 현재의 자갈치, 충무동, 남포동 해안 일대를 매립한 남빈 매축공사를 실시하였고 영도와 부산을 잇는 절영도 대교 가설공사까지 완성함으로써 현재 부산 원도심의 모습을 거의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2동에 위치한 동부경찰서 정문 우측에 있는 부산진 매축 기념비입니다. 화강암 재질의 비 앞면에는 '부산진 매축 기념비'라는 비명을 새겼으며 1939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중앙로는 남포동에서 서면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매축에 따른 해안선 변화
북빈 매축과 부산진 매축, 영선산 창평 공사 등을 통해 부산의 해안선은 크게 달려졌습니다. 그 배경에는 전관거류지의 확장을 일본의 식민지 확장과 동일하게 생각했던 일본 정부의 음모가 숨어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과거 동래로 대표되는 부산의 공간은 전근대의 공간으로 바뀌었고 부산포, 즉 현재의 원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부산이 근대의 공간으로 재편성되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시행된 부산의 여러 매축공사는 전근대의 공간 부산포에 근대의 공간 부산 즉, 일본 전관거류지의 확장을 위한 일본의 노력이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근대문명의 혜택은 대다수의 식민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닌 소수의 일본인과 미래의 일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